배타성까지도 상품성이다
마샬 맥루언(Marshall McLuhan)은 1964년에 “미디어가 메시지다”라고 선언했다. 텔레비전이 전달하는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텔레비전이라는 형식 자체가 세상을 바꾼다는 거다. 뉴스를 보든 드라마를 보든 상관없다. 화면 앞에 앉아서 수동적으로 시청하는 행위 자체가 인간의 인지 구조를 재편한다.
이 통찰을 상품에 적용하면 재미있는 게 보인다. 제품의 기능이 메시지가 아니다. 제품을 획득하는 방식 자체가 메시지다.
에르메스 버킨백을 보자. 가죽 가방이다. 물건을 담는다. 기능은 그게 전부다. 근데 이 가방을 사려면 매장에 가서 돈을 내면 안 된다. 먼저 에르메스와 “관계”를 쌓아야 한다. 스카프도 사고, 벨트도 사고, 향수도 사면서 수백만 원을 쓴다. 그래도 안 판다. 담당 SA(Sales Associate)가 “이 고객은 버킨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대기자 명단에 올라가도 몇 년을 기다린다. 운이 좋아야 연락이 온다.
이게 불편한가? 에르메스 입장에서는 이게 상품이다. 맥루언 식으로 말하면, 버킨백의 내용(가죽, 바느질, 디자인)이 메시지가 아니다. 버킨백을 획득하는 과정 자체가 메시지다. “아무나 못 산다”는 것. “나는 선택받았다”는 것. 그게 수천만 원의 가격표를 정당화한다.
앞서 정리한 개념으로 다시 보자. 상품형(기표)과 상품해(기의)가 있다. 상품형은 물리적 실체다. 버킨백의 상품형은 가죽, 금속 잠금장치, 손잡이다. 상품해는 대상이 부여하는 의미다. 버킨백의 상품해는 “나는 에르메스에게 인정받은 사람”이다.
배타성은 상품형이 아니다. 상품형에는 배타성이 없다. 똑같은 가방을 백화점에서 바로 살 수 있다면 상품형은 동일하다. 가죽도 같고 바느질도 같다. 근데 상품해가 완전히 달라진다. “아무나 사는 가방”이 되는 순간, 수천만 원을 낼 이유가 사라진다.
배타성은 상품해에서 작동한다. “쉽게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의미를 만든다. 맥루언이 말한 것처럼,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메시지인 것이다.
Supreme은 이걸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매주 목요일, 한정 수량 드롭. 온라인은 몇 초 만에 품절되고, 오프라인 매장 앞에는 전날부터 줄이 선다. 티셔츠 한 장에 4만 원인데, 리셀 시장에서는 40만 원에 거래된다. 왜? 못 샀으니까. 상품형은 면 티셔츠다. 로고 박혀 있다. 그게 전부다. 근데 상품해는 “나는 드롭에 성공한 사람”이다. 줄 서서 기다렸거나, 봇을 돌렸거나, 운이 좋았거나. 어쨌든 희소한 걸 손에 넣었다. Supreme은 티셔츠를 파는 게 아니다. 성공적인 사냥 경험을 판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센추리온 카드, 일명 블랙카드. 신청 불가다. 회사가 먼저 연락해야 한다. 연회비 5,000달러가 넘는다. 혜택? 공항 라운지, 컨시어지 서비스, 호텔 업그레이드. 다른 프리미엄 카드도 비슷한 거 준다. 근데 블랙카드는 “너희가 먼저 와서 달라고 해도 안 줘”라는 포지션이다. 카드의 상품형은 플라스틱 조각이다. 결제 기능. 상품해는 “Amex가 나를 선택했다”다. 지갑에서 꺼낼 때마다 그 신호가 전달된다.
소호 하우스(Soho House)는 멤버십 클럽이다. 가입하려면 심사를 받아야 한다. 직업이 뭔지, 크리에이티브 업계인지, 기존 멤버 추천이 있는지. 탈락하는 사람도 많다. 들어가면 뭘 하나? 호텔 수영장 쓰고, 라운지에서 일하고, 바에서 술 마신다. 다른 멤버십 클럽과 기능은 비슷하다. 근데 소호 하우스의 진짜 상품은 심사 과정이다. “나는 여기 들어올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았다.” 그게 연회비 수백만 원의 본질이다. 맥루언 식으로 보면, 수영장과 라운지가 메시지가 아니다. 입장 심사가 메시지다.
코스트코(Costco)도 배타성을 쓴다. 방향이 다를 뿐이다. 멤버십 없으면 매장에 들어갈 수도 없다. 연회비 5만 원 정도. 버킨백과 비교하면 우스운 금액이다. 근데 이 작은 장벽이 상품해를 만든다. 코스트코에서 장 보는 사람은 “나는 알뜰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산다. 멤버십 카드를 꺼내서 스캔할 때마다 그 정체성이 확인된다. 입장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여기는 아무나 오는 마트가 아니다”라는 신호를 보낸다.
페라리는 아예 초청제로 운영한다. 신차가 나오면 기존 고객 중에서 페라리가 “이 사람에게 살 기회를 주겠다”고 판단한 사람에게만 연락이 간다. 돈이 있어도 못 산다. 롤렉스 데이토나도 마찬가지다. 매장에 가서 “데이토나 주세요” 하면 안 판다. 대기열에 이름을 올리고 몇 년을 기다린다. 그 사이에 다른 시계들을 사면서 “좋은 고객”임을 증명해야 한다.
이게 뭔가? 불편함을 파는 거다. 쉽게 살 수 없다는 것 자체를 파는 거다. 맥루언의 관점에서 보면, 시계의 무브먼트나 자동차의 엔진이 메시지가 아니다. 그걸 획득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 메시지다.
인앤아웃(In-N-Out)의 시크릿 메뉴도 같은 원리다. 메뉴판에 없다. “애니멀 스타일”이나 “프로틴 스타일”은 알아야만 주문할 수 있다. 햄버거 자체는 5달러짜리다. 럭셔리가 아니다. 근데 시크릿 메뉴를 안다는 건 “나는 인사이더”라는 신호다. 배타성의 가격이 0원인 경우. 돈이 아니라 정보가 입장권이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있다. 배타성이 모든 상품에 작동하는 건 아니다. 배타성이 상품해로 전환되려면 조건이 있다.
첫째, 대상이 그 배타성을 원해야 한다. 버킨백을 사려는 사람은 “선택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그냥 가방 필요한 사람은 대기열이 불편할 뿐이다. Supreme 드롭에 참여하는 사람은 사냥의 스릴을 즐긴다. 그냥 옷 필요한 사람은 유니클로 간다. 상품해는 대상이 결정한다. 상품은 중립이다.
둘째, 배타성 뒤에 실체가 있어야 한다. 아무 제품이나 대기열을 만들면 작동하는 게 아니다. 에르메스 장인정신은 진짜다. 페라리 성능은 진짜다. Supreme 디자인은 스트리트웨어 역사에서 진짜 위치가 있다. 상품형이 일정 수준을 넘어야 배타성이 상품해로 전환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거만한 회사다.
셋째, 배타성이 신호로 작동해야 한다. “나는 이걸 살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신호가 사회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 버킨백을 들고 다니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본다. 블랙카드를 꺼내면 특정 맥락에서 신호가 전달된다. 신호가 작동하지 않는 배타성은 그냥 불편함이다.
맥루언은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고도 했다. 텔레비전은 눈의 확장이고, 라디오는 귀의 확장이다. 배타성은 뭘 확장하는가? 정체성이다. “나는 이걸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자아 이미지를 확장한다.
상품형만 보면 버킨백은 가방이다. Supreme은 티셔츠다. 블랙카드는 플라스틱이다. 상품해까지 보면 전부 정체성 장치다. 기능을 파는 게 아니라 의미를 판다. 내용을 파는 게 아니라 형식을 판다.
배타성까지도 상품성이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배타성이 상품성의 핵심이다. 맥루언이 미디어를 분석한 방식으로 상품을 분석하면 이게 보인다. 제품이 뭘 하는지가 아니라, 제품을 어떻게 얻는지가 메시지인 시장이 있다.
에르메스는 가방을 팔지 않는다. Supreme은 티셔츠를 팔지 않는다. Amex는 결제 수단을 팔지 않는다. 전부 “당신은 선택받았다”를 판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디어는 제품이 아니라 대기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