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스택 고객 여정 지도 2편: 고객은 진공에서 오지 않는다
바벨칩(BabelChip)을 만든 사람이 있다고 치자. 목 뒤에 붙이는 패치형 디바이스. 수면 중에 언어중추에 미세전류를 흘려서 영어 패턴을 주입한다. 3개월 과정, 270만원. SF처럼 들리지만 효과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제 이걸 팔아야 한다.
마케팅팀이 모여서 광고를 만든다. "잠들기 전엔 못했는데, 일어나니 됩니다." 카피는 괜찮다. 영상도 만들었다. 30대 직장인이 자고 일어나서 외국인 동료와 유창하게 대화하는 장면. 나쁘지 않다. 유튜브에 올린다. 1000만 뷰를 찍는다.
그런데 전환율이 3개 그룹에서 완전히 다르게 나온다.
첫 번째 그룹은 클릭하고 랜딩페이지까지 와서 결제 직전에 이탈한다. 두 번째 그룹은 광고를 보자마자 댓글에 "사기"라고 쓴다. 세 번째 그룹은 광고 본 지 10분 만에 결제한다.
같은 광고다. 같은 제품이다. 왜 반응이 다를까.
마케팅에서 가장 흔한 착각이 있다. 고객이 빈 도화지 상태로 온다는 착각이다. AIDA 모델이 이걸 전제한다. 주목(Attention)에서 시작해서 관심(Interest), 욕구(Desire), 행동(Action)으로 간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 광고를 보고 처음 세상을 알게 된 것처럼.
현실은 다르다. 고객은 짐을 지고 온다.
어떤 사람은 영어학원을 세 번 다녔다가 세 번 포기했다. 어떤 사람은 전화영어를 1년 했는데 남은 건 결제 내역뿐이다. 어떤 사람은 회사에서 틀어주는 인강을 2년째 1강에서 멈춰놨다. 어떤 사람은 "뇌과학"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유사과학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은 지금 쓰는 영어앱에 만족하고 있다.
이 사람들한테 같은 광고를 보여주면 같은 반응이 나올까. 나올 리가 없다.
바벨칩의 잠재 고객을 이전 경험(Prior Experience) 상태로 나눠보자. 일곱 가지가 나온다.
첫째, 첫 경험자(First-timer). 영어 공부라는 걸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다. 학교 다닐 때 수능 영어 본 게 전부다. 이 사람들은 비교 기준이 없다. 바벨칩이 비싼지 싼지 모른다. 270만원이 많아 보여도 "영어 학원 1년 다니면 그 정도 나오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그룹한테는 교육이 필요하다. 뇌과학 원리, 왜 수면 중 학습이 효과적인지, 기존 방법과 뭐가 다른지. 권위가 먹힌다. 서울대 뇌과학 연구팀 출신 창업자, 네이처 논문 인용, 이런 것들.
둘째, 인지-미행동자(Aware-Inactive). 영어 공부해야 한다는 건 안다. 방법도 대충 안다. 근데 안 했다. "시간이 없어서", "다음 달부터", "요즘 바빠서". 이 그룹은 정보가 부족한 게 아니다. 동기가 부족하다. 바벨칩 광고를 봐도 "오 신기하네" 하고 넘어간다. 이 사람들한테는 제품 설명이 아니라 트리거가 필요하다. "6개월 뒤 해외 주재원 발령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같은.
셋째, 경쟁사 만족자(Competitor-Satisfied). 지금 다른 방법으로 영어 공부를 하고 있고, 만족한다. 스픽 앱을 매일 30분씩 쓰고 있는데 실력이 늘고 있다. 이 그룹은 가장 공략하기 어렵다. 바벨칩이 아무리 좋아도 "나 지금 잘 하고 있는데 왜 바꿔?"라고 생각한다. 270만원 쓸 이유가 없다. 이 그룹은 단기적으로 포기하는 게 맞다. 지금 쓰는 방법에 불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넷째, 경쟁사 실망자(Competitor-Disappointed). 여기가 황금 세그먼트다. 인강 해봤다. 안 됐다. 전화영어 해봤다. 안 됐다. 학원도 다녀봤다. 중간에 야근 터져서 그만뒀다. 영어앱 3개 깔았는데 다 1주일 만에 삭제했다. 이 사람들은 "또 다른 방법"을 찾고 있다. 바벨칩 광고를 보면 "이번엔 진짜 다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한다. 단, 조심해야 할 게 있다. 이 사람들은 의심도 많다. "이것도 결국 똑같은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래서 "왜 이건 다른가"를 명확하게 보여줘야 한다. "의지력 필요 없음. 자면서 됨." 이 메시지가 핵심이다. 기존 방법들이 왜 실패했는지를 알고, 바벨칩은 그 실패 원인을 우회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다섯째, 자사 만족자(Our-Satisfied). 바벨칩을 이미 써봤고 만족한 사람. 이 그룹은 신규 획득이 아니라 유지와 확장의 대상이다. 후기를 쓰게 하고, 주변에 추천하게 하고, 다음 제품(일본어 버전?)을 사게 한다. 마케팅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그룹이다.
여섯째, 자사 실망자(Our-Disappointed). 바벨칩을 써봤는데 효과가 없었다고 느끼는 사람. 가장 위험한 그룹이다. 나쁜 후기를 쓴다. 환불을 요구한다. 커뮤니티에 "사기"라고 글을 올린다. 이 그룹은 마케팅이 아니라 고객 서비스의 영역이다. 신규 광고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이 그룹이 댓글에 "저 써봤는데 안 됩니다"라고 쓰면 끝이다.
일곱째, 카테고리 회의론자(Category-Skeptic). 가장 단단한 벽이다. 이 사람들은 바벨칩이 아니라 "뇌과학 학습" 자체를 불신한다. "뇌에 전기 흘린다고 영어가 되면 다 하지." "이런 거 다 유사과학이야." "FDA 승인은 받았어?" 이 그룹한테는 제품 광고가 안 먹힌다. 회사가 하는 말은 다 "파는 쪽 주장"으로 들린다. 온드 미디어(Owned Media)의 한계다. 자기 채널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신뢰가 안 쌓인다. 이 그룹을 뚫으려면 제3자 검증이 필요하다. 언론 보도, 학술 논문, 유명인 실사용 후기.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 그룹은 공략 대상에서 제외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설득 비용이 너무 높다.
같은 광고가 왜 다르게 먹히는지 이제 보인다.
"잠들기 전엔 못했는데, 일어나니 됩니다."
첫 경험자한테 이 카피는 신기하게 들린다. 관심을 끈다. 더 알아보고 싶어진다.
경쟁사 실망자한테 이 카피는 희망으로 들린다. "드디어 의지력 없이 되는 방법이 나왔나?" 클릭한다.
카테고리 회의론자한테 이 카피는 사기 냄새로 들린다. "자면서 영어가 된다고? 이게 말이 돼?" 댓글에 "ㅋㅋ"를 쓴다.
같은 3초다. 같은 카피다. 그런데 그 3초에 고객이 짊어지고 온 과거가 다르다. 과거가 다르면 해석이 다르다. 해석이 다르면 행동이 다르다.
여기서 실무적 질문이 나온다. 그러면 광고를 일곱 개 만들어야 하나?
꼭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최소한 메인 타겟이 누구인지는 정해야 한다.
바벨칩의 경우, 초기 마케팅 자원이 한정돼 있다면 경쟁사 실망자를 먼저 노려야 한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이들은 이미 "영어 공부해야 한다"는 동기가 있다. 인지-미행동자처럼 동기부터 만들어줄 필요가 없다.
둘째, 이들은 기존 방법에 실망했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에 열려 있다. 경쟁사 만족자처럼 현재 상태에 안주하지 않는다.
셋째, 이들은 카테고리 회의론자보다 설득 비용이 낮다. "뇌과학 자체가 사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기존 방법이 나한테 안 맞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인 광고는 경쟁사 실망자를 향해 만든다. "인강 3번 끊었다. 전화영어 6개월 했다. 학원도 다녔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바벨칩은 다르다. 의지력이 필요 없다. 자면 된다."
이 광고를 첫 경험자가 보면? 약간 맥락이 안 맞지만 관심은 끌 수 있다. 카테고리 회의론자가 보면? 여전히 안 먹히지만 어차피 지금은 공략 대상이 아니다.
고객 여정 지도를 그릴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 고객은 어디서 오는가?"
진공에서 오지 않는다. 과거에서 온다. 그 과거가 무엇인지에 따라 같은 메시지가 희망이 되기도 하고, 헛소리가 되기도 한다.
바벨칩 마케팅팀이 1000만 뷰를 찍고도 전환율이 낮다면, 광고가 잘못된 게 아닐 수 있다. 그 1000만 뷰 중에 경쟁사 실망자가 얼마나 있었는지, 카테고리 회의론자가 얼마나 있었는지를 봐야 한다. 타겟이 아닌 사람한테 아무리 좋은 광고를 보여줘도 전환은 안 된다.
다음 편에서는 두 번째 축을 다룬다. 같은 경쟁사 실망자라도 "언젠간 영어해야지" 수준인 사람과 "3개월 뒤 해외발령인데 영어 안 되면 죽는다" 수준인 사람은 다르다. 동기의 강도가 다르면 전략도 달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