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스택 고객 여정 지도 4편: 콜라 고르는 3초와 뇌에 칩 붙이는 3개월
편의점에 들어간다. 음료 코너 앞에 선다. 코카콜라, 펩시, 제로콜라, 스프라이트. 3초 만에 손이 나간다. 뭘 골랐는지 의식도 못 한다. 계산하고 나와서 마신다. 다음 날도 비슷한 걸 산다.
바벨칩을 산다고 치자. 270만원이다. 목 뒤에 붙이는 거다. 뇌에 전기가 흐른다. 3초 만에 결제하는 사람은 없다. 홈페이지를 본다. 후기를 찾는다. 유튜브에 검색한다. "바벨칩 사기"도 검색한다. 가족한테 물어본다. 며칠 고민한다. 어쩌면 몇 주. 그래도 확신이 안 선다.
같은 "구매"다. 같은 AIDA를 거친다. 근데 완전히 다른 게임이다.
고관여(High-involvement)와 저관여(Low-involvement). 마케팅에서 가장 기본적인 구분 중 하나인데, 실무에서는 의외로 무시된다. "우리도 바이럴 영상 만들자." 저관여 제품 전략을 고관여 제품에 그대로 쓴다. 안 먹힌다. "우리도 상세페이지 길게 만들자." 고관여 제품 전략을 저관여 제품에 쓴다. 아무도 안 읽는다.
관여도가 다르면 고객의 뇌가 다르게 작동한다.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 말한 시스템 1과 시스템 2다. 시스템 1은 빠르고 자동적이다. 직관이다. 시스템 2는 느리고 의식적이다. 분석이다.
편의점에서 콜라 고를 때는 시스템 1이 작동한다. 생각 안 한다. 손이 먼저 간다. 익숙한 걸 집는다. 바벨칩 살 때는 시스템 2가 작동한다. 비교한다. 따진다. 의심한다. "270만원 날리면 어떡하지?"가 머릿속을 맴돈다.
재밌는 건 시스템 2가 작동해도 시스템 1이 최종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다. fMRI 연구 결과들이 이걸 보여준다.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분석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느낌"으로 결정하고 논리로 정당화한다. 고관여 제품도 결국 감정이 결정한다. 다만 그 감정에 도달하기까지 훨씬 많은 정보와 시간이 필요하다.
바벨칩은 고관여 제품이다.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가격이 높다. 270만원. 잘못 사면 아프다. "에이 뭐 한번 써보지"가 안 된다.
몸에 붙이는 거다. 물리적 위험이 느껴진다. "뇌에 전기가 흐른다고? 괜찮은 거야?" 심리적 저항이 크다.
결과가 불확실하다. 콜라는 사면 뭘 얻는지 안다. 바벨칩은 모른다. "진짜 영어가 될까?" 3개월 써봐야 안다.
되돌리기 어렵다. 콜라가 맛없으면 버리면 된다. 1800원 날린다. 바벨칩이 안 되면 270만원이 날아간다. 3개월이라는 시간도 날아간다.
이런 특징들이 있으면 고객은 신중해진다. 당연하다. 신중해지면 정보를 찾는다. 비교하고, 검증하고, 확인받고 싶어 한다. 여기서 마케팅 전략이 달라져야 한다.
저관여 제품의 마케팅은 단순하다. 두 가지만 하면 된다. 정신적 가용성(Mental Availability)과 물리적 가용성(Physical Availability).
정신적 가용성은 "그 상황에서 떠오르는가"다. 목마를 때 코카콜라가 떠오르면 정신적 가용성이 높은 거다. 광고를 많이 본 브랜드, 로고가 익숙한 브랜드, 색깔이 눈에 익은 브랜드가 떠오른다.
물리적 가용성은 "그 순간 살 수 있는가"다. 코카콜라가 떠올라도 편의점에 펩시밖에 없으면 펩시를 산다. 유통이 넓을수록,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을수록 물리적 가용성이 높다.
저관여 제품은 설득이 필요 없다. 떠오르고, 거기 있으면 산다. 그래서 코카콜라는 설명하지 않는다. "코카콜라는 이런 원료로 만들어졌고, 건강에 이런 영향이 있고, 경쟁사 대비 이런 장점이 있습니다"—이런 광고 본 적 없다. 그냥 빨간색 보여주고, 시원한 느낌 보여주고, 로고 박는다. 반복한다. 그게 전략이다.
바벨칩한테 이 전략을 쓰면 망한다. "바벨칩" 로고만 반복해서 보여주면 사람들이 살까? 안 산다. 270만원짜리를 로고 보고 사는 사람은 없다.
고관여 제품의 마케팅은 복잡하다. 신뢰를 쌓아야 한다. 신뢰는 시간이 걸린다.
바벨칩을 사려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질문이 쌓여 있다. "이거 진짜 되는 거야?", "사기 아니야?", "부작용은 없어?", "환불은 돼?", "써본 사람 후기는?", "왜 이렇게 비싸?", "더 싼 대안은 없어?", "이 회사 믿을 만해?". 이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하나라도 답이 안 되면 구매가 막힌다.
그래서 고관여 제품은 콘텐츠가 길어진다. 랜딩페이지가 길다. 상세페이지가 길다. 이메일 시퀀스가 길다. 짧으면 질문에 답이 안 되니까.
근데 여기서 함정이 있다. 길다고 다 읽지 않는다. 구조화가 필요하다. 질문 순서대로 답해야 한다. 가장 큰 의심부터 먼저 해소해야 한다.
바벨칩의 경우 가장 큰 의심은 뭘까. "이거 진짜 되는 거야?" 과학적 원리와 효과 증거가 먼저 와야 한다. 그다음 "부작용은 없어?" 안전성 인증, 임상 결과. 그다음 "비싸네?" 가격 정당화, 기존 방법 대비 비용 비교. 이 순서가 뒤바뀌면 효과가 떨어진다. 가격을 먼저 말하면 "비싸네" 하고 나간다.
고관여 제품에는 터치포인트(Touchpoint)가 많이 필요하다. 한 번 광고 보고 바로 사는 사람은 드물다.
연구에 따르면 고관여 제품은 평균 20회 이상의 터치포인트가 필요하다. 어떤 경우는 100회 이상. 광고 한 번, 블로그 글 한 번, 유튜브 영상 한 번, 후기 몇 개, 친구한테 물어보기, 뉴스레터 몇 통, 리타게팅 광고 몇 번. 이게 쌓여서 결국 "사야겠다"가 된다.
저관여 제품은 3~15회면 된다. 몇 번 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산다.
바벨칩 마케팅팀이 광고 한 번 돌리고 전환율이 낮다고 좌절하면 안 된다. 원래 그렇다. 고관여 제품은 긴 호흡으로 가야 한다. 첫 접촉에서 바로 구매를 기대하면 안 된다. 첫 접촉의 목표는 기억에 남는 것, 또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뉴스레터 구독, 무료 상담 신청, 카카오톡 채널 추가. 작은 전환을 먼저 받고, 거기서부터 관계를 쌓는다.
한 가지 더. 고관여 제품은 제3자 신뢰가 중요하다.
저관여 제품은 회사가 직접 말해도 된다. "코카콜라, 짜릿한 그 맛." 회사가 하는 말인 줄 다 안다. 상관없다. 어차피 크게 고민 안 하고 사니까.
고관여 제품은 회사가 말하면 안 믿는다. "바벨칩, 3개월 만에 영어 완성." 회사가 하는 말이다. "당연히 자기네 제품 좋다고 하겠지." 신뢰가 안 쌓인다.
그래서 고관여 제품은 언드 미디어(Earned Media)가 중요하다. 언론 보도, 전문가 추천, 실사용자 후기, 학술 논문. 회사 돈으로 산 게 아닌 것처럼 보이는 콘텐츠. 2편에서 말한 카테고리 회의론자를 뚫으려면 이게 필수다. 근데 카테고리 회의론자가 아니더라도, 고관여 제품 전체에서 제3자 신뢰는 중요하다.
바벨칩이라면 이런 게 필요하다. 서울대 뇌과학 교수 인터뷰. "수면 중 학습은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네이처 논문 인용. 유명 유튜버의 3개월 사용 후기 (협찬 아닌 척 하면 안 되고, 협찬이라도 진짜 써보고 진짜 효과 있어야 함). 이런 것들이 쌓여야 "믿어볼 만하네"가 된다.
온드 미디어(Owned Media)만으로는 고관여 제품 마케팅이 한계가 있다. 회사 블로그에 아무리 좋은 글 써도 "결국 파는 쪽이 쓴 글이잖아"라는 의심을 넘기 어렵다.
관여도에 따라 퍼널 설계가 달라진다.
저관여 제품의 퍼널은 짧다. 인지 → 구매. 중간에 별로 없다. 봤다. 샀다. 끝.
고관여 제품의 퍼널은 길다. 인지 → 관심 → 정보 탐색 → 비교 → 신뢰 형성 → 구매 결심 → 구매 → 사용 → 재구매/추천. 단계가 많다. 각 단계마다 이탈이 생긴다. 각 단계마다 다른 콘텐츠가 필요하다.
인지 단계에서는 바이팅이 필요하다. "자면서 영어가 된다." 3초 안에 멈추게 해야 한다.
정보 탐색 단계에서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원리, 효과, 안전성, 가격. 질문에 답해야 한다.
비교 단계에서는 경쟁 우위를 보여줘야 한다. "인강, 전화영어, 학원 다 해봤는데 왜 안 됐는지 아세요? 의지력이 필요하니까요. 바벨칩은 다릅니다."
신뢰 형성 단계에서는 제3자 증거가 필요하다. 후기, 언론 보도, 전문가 의견.
구매 결심 단계에서는 위험 제거가 필요하다. "효과 없으면 100% 환불." "3일 무료 체험."
단계마다 콘텐츠가 다르다. 인지 단계 콘텐츠를 구매 결심 단계에 보여주면 효과가 없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니까. 구매 결심 단계 콘텐츠를 인지 단계에 보여주면 효과가 없다. 아직 관심도 없는데 환불 정책을 말해봤자.
쾌락적 고관여(Hedonic High-involvement)라는 게 있다. 명품이 여기 속한다.
에르메스 버킨백은 1500만원이 넘는다. 고관여 제품이다. 근데 작동 방식이 다르다. 합리적 정보 탐색을 하지 않는다. "버킨백의 가죽 품질 분석", "버킨백 vs 샤넬 플랩백 비교"—이런 콘텐츠가 잘 안 먹힌다. 대신 희소성과 정체성이 먹힌다. "대기 명단 2년", "아무나 못 삼", "이걸 들면 나는 이런 사람이 된다."
바벨칩은 쾌락적 고관여가 아니다. 실용적 고관여(Utilitarian High-involvement)다. 영어가 되냐 안 되냐의 문제다. 정체성이 아니라 효과의 문제다. 그래서 논리적 설득이 필요하다.
만약 바벨칩을 쾌락적 고관여로 포지셔닝한다면 어떻게 될까. "바벨칩을 쓰는 사람은 뭔가 다르다. 남들이 학원 다닐 때 잠을 잔다. 스마트한 선택을 하는 사람만 바벨칩을 쓴다." 이런 식의 포지셔닝. 가능은 하다. 근데 바벨칩의 본질은 "영어 실력 향상"이다. 이 본질을 벗어나면 위험하다.
이제 세 개의 축이 있다.
이전 경험: 고객이 어떤 짐을 지고 오는가.
동기의 강도: 얼마나 급한가.
관여도: 얼마나 신중하게 결정하는가.
세 축을 조합하면 세그먼트가 나온다.
경쟁사 실망자 + 긴급 동기 + 고관여. 바벨칩 최고의 타겟이다. 급하고, 새 방법에 열려 있고, 그래도 신중하게 따진다. 이 사람들한테는 "왜 바벨칩은 다른가"를 명확히 설명하고, 제3자 증거를 보여주고, 3개월 안에 된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
첫 경험자 + 잠재 동기 + 저관여. 영어 공부 생각 없는데 뭔가 재밌어 보여서 클릭한 사람. 전환 가능성 거의 없다. 광고비 낭비.
카테고리 회의론자 + 인식된 동기 + 고관여. 영어는 해야겠는데 "뇌과학 학습"을 안 믿는 사람. 설득 비용이 너무 높다. 제3자 증거 잔뜩 쌓아도 안 될 수 있다. 이 세그먼트는 포기하거나 장기 투자 대상으로 봐야 한다.
관여도를 무시하면 마케팅이 헛돈다.
고관여 제품에 저관여 전략을 쓰면 "왜 전환이 안 되지?" 하게 된다. 광고는 많이 봤는데 아무도 안 산다. 당연하다. 한 번 보고 살 제품이 아니니까.
저관여 제품에 고관여 전략을 쓰면 "왜 아무도 안 읽지?" 하게 된다. 상세페이지 열심히 만들었는데 스크롤도 안 내린다. 당연하다. 읽을 제품이 아니니까.
바벨칩은 고관여 제품이다. 그 규칙으로 마케팅해야 한다. 긴 호흡. 여러 터치포인트. 제3자 신뢰. 단계별 콘텐츠. 위험 제거. 이게 바벨칩의 문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