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스택 고객 여정 지도 5편: 112개 중에 3개를 고르는 법

세 개의 축이 있다.

이전 경험 7가지. 첫 경험자, 인지-미행동자, 경쟁사 만족자, 경쟁사 실망자, 자사 만족자, 자사 실망자, 카테고리 회의론자.

동기의 강도 4가지. 잠재, 인식, 활성, 긴급.

관여도 4가지. 저관여, 중관여, 고관여, 쾌락적 고관여.

조합하면 7 × 4 × 4 = 112개다. MBTI가 16개인데, 이건 100개가 넘는다.

112개 세그먼트를 전부 공략할 수는 없다. 그럴 자원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대부분의 세그먼트는 우리 제품과 상관없거나, 전환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공략 비용이 너무 높다.

이 조합을 만드는 이유는 전부 공략하려는 게 아니다. 112개 중에서 진짜 노려야 할 3~5개를 골라내려는 거다. 거기에 모든 자원을 집중해서 완전히 먹고, 그다음 효율적인 그룹으로 넓혀가려는 거다.

분할 정복(Divide and Conquer). 시장을 쪼개고, 하나씩 점령한다.


바벨칩을 보자. 112개 조합 중에 뭘 먼저 노려야 할까.

제일 먼저 탈락시킬 수 있는 게 있다. 관여도가 안 맞는 조합이다.

바벨칩은 270만원짜리 뇌 패치다. 고관여 제품이다. 저관여 조합은 전부 탈락이다. 바벨칩을 편의점에서 콜라 고르듯이 사는 사람은 없다. 저관여 마케팅 전략(반복 노출, 정신적 가용성)은 바벨칩에 안 먹힌다. 28개 조합이 빠진다. 84개 남았다.

쾌락적 고관여도 빠진다. 바벨칩은 에르메스가 아니다. 영어가 되냐 안 되냐의 실용적 문제다. 28개 더 빠진다. 56개 남았다.

중관여는 애매하다. 바벨칩은 중관여라기엔 가격이 높고 위험이 크다. 28개 더 빠진다. 28개 남았다. 고관여 조합만 남았다.


28개 중에서 또 걸러낸다. 이번엔 이전 경험 축이다.

경쟁사 만족자. 지금 다른 방법으로 영어 공부하고 있고, 만족하고 있다. 스픽 앱을 매일 쓰는데 실력이 늘고 있다. 이 사람을 바벨칩으로 전환시키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 "지금 잘 되고 있는데 왜 270만원을 써?"라는 저항을 넘어야 한다. 4개 조합 탈락. 24개 남았다.

자사 실망자. 바벨칩을 써봤는데 안 됐다고 느끼는 사람. 이 사람한테 다시 팔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마케팅이 아니라 고객 서비스 영역이다. 4개 조합 탈락. 20개 남았다.

카테고리 회의론자. "뇌과학 학습? 다 사기야." 이 사람을 설득하려면 제3자 증거가 잔뜩 필요하다. 비용이 너무 높다. 제품 초기 단계에서 노릴 타겟이 아니다. 4개 조합 탈락. 16개 남았다.


16개가 남았다. 이전 경험 4가지(첫 경험자, 인지-미행동자, 경쟁사 실망자, 자사 만족자) × 동기 강도 4가지(잠재, 인식, 활성, 긴급).

여기서 동기 강도로 우선순위를 매긴다.

잠재 동기. 영어가 필요한 줄도 모르는 사람. 문제 인식부터 시켜야 한다. 너무 멀다. 4개 조합 후순위.

인식된 동기. "영어 해야 하는데"라고 매년 생각하는 사람. 급하지 않다. 270만원 쓸 이유가 아직 없다. 4개 조합 중순위.

활성 동기. 지금 영어 공부 방법을 찾고 있다. 검색하고 비교한다. 4개 조합 고순위.

긴급 동기. 3개월 뒤 해외 발령. 영어 안 되면 죽는다. 4개 조합 최우선순위.


최우선순위 4개 중에서 1순위를 고른다.

경쟁사 실망자 + 긴급 동기 + 고관여. 이게 바벨칩의 첫 번째 점령지다.

이유가 세 가지다.

첫째, 동기 형성 비용이 0이다. "영어 해야 한다"는 걸 설득할 필요가 없다. 이미 알고 있다. 급하기까지 하다.

둘째, 마음이 열려 있다. 기존 방법에 실망했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다. 경쟁사 만족자처럼 "지금 잘 되고 있는데 왜 바꿔?"라는 저항이 없다.

셋째, 메시지가 명확하다. "기존 방법은 의지력이 필요하니까 실패한 겁니다. 바벨칩은 다릅니다." 이 한 문장이 이 세그먼트 전체를 관통한다.


첫 번째 점령지가 정해졌으면 거기에 모든 걸 맞춘다.

바이팅(Biting). 3초 안에 이 세그먼트의 발목을 잡는 메시지. "인강 끊어봤죠. 전화영어도 해봤죠. 학원도 다녀봤죠. 안 됐죠." 이 사람의 과거를 읽어준다. "나 얘기하는 거 아니야?" 멈춘다.

마크(Mark). 머릿속에 박히는 한 문장. "의지력 필요 없음. 자면서 됨." 이게 바벨칩의 마크다. 경쟁사 실망자한테 이 마크는 희망으로 들린다. 기존 방법이 왜 실패했는지를 알고, 바벨칩은 그 실패 원인을 우회한다는 게 담겨 있다.

오퍼(Offer). 이 세그먼트의 저항을 제거하는 제안. 긴급 동기 세그먼트는 가격에 덜 민감하다. 대신 "진짜 되냐"에 민감하다. 그래서 "효과 없으면 100% 환불"이 오퍼가 된다. 가격 할인이 아니라 위험 제거가 핵심이다.

바이팅, 마크, 오퍼. 세 가지가 전부 이 세그먼트에 최적화된다. 다른 세그먼트는 신경 안 쓴다. 카테고리 회의론자가 이 광고를 보고 "사기 냄새 난다"고 해도 상관없다. 타겟이 아니다.


첫 번째 점령지를 완전히 먹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

그 세그먼트에서 바벨칩이 1순위가 되는 거다. "영어 급한데 기존 방법 다 실패한 사람"이 영어 솔루션을 떠올릴 때, 바벨칩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거다. 그 세그먼트의 커뮤니티에서 "바벨칩 써봤는데 진짜 됨"이라는 후기가 도는 거다. 그 세그먼트 안에서는 바벨칩이 디폴트가 되는 거다.

이게 되면 몇 가지가 생긴다.

후기가 쌓인다. 경쟁사 실망자 + 긴급 동기 세그먼트의 성공 후기가 쌓인다. "인강, 전화영어 다 안 됐는데 바벨칩은 됐다." 이 후기는 같은 세그먼트 사람들한테 강력하게 먹힌다. 내 얘기처럼 들리니까.

입소문이 돈다. 이 세그먼트 안에서 바벨칩 얘기가 퍼진다. "야 너 해외 발령 났다며? 바벨칩 써봐." 마케팅 비용 안 들이고 전환이 생긴다.

가격 저항이 줄어든다. "270만원이요?"가 아니라 "270만원으로 됐대"가 된다. 가격이 아니라 결과가 얘기된다. 같은 세그먼트 안에서 사회적 증거(Social Proof)가 형성된다.


첫 번째 점령지를 먹었으면 다음으로 넓힌다.

두 번째 점령지. 경쟁사 실망자 + 활성 동기 + 고관여. 급하지는 않지만 지금 방법을 찾고 있는 사람. 긴급 동기보다 전환율은 낮지만 모수가 훨씬 크다.

이 세그먼트로 넓힐 때, 첫 번째 점령지의 자산을 가져간다. "긴급했던 사람들이 3개월 만에 성공했다"는 후기. "의지력 필요 없음. 자면서 됨"이라는 마크. 이미 검증된 바이팅. 첫 번째 점령지에서 만든 콘텐츠와 증거를 재활용한다.

다른 건 오퍼다. 활성 동기 세그먼트는 긴급 동기보다 가격에 민감하다. 급하지 않으니까 "좀 더 싼 거 없나?" 비교한다. 여기선 가격 정당화가 더 필요하다. "영어 학원 1년 다니면 300만원 넘게 듭니다. 바벨칩은 270만원에 3개월이면 끝납니다." 비교 프레임을 제시한다.

세 번째 점령지. 첫 경험자 + 긴급 동기 + 고관여. 영어 공부를 진지하게 해본 적 없는데 갑자기 급해진 사람. 비교 기준이 없어서 교육이 좀 더 필요하다. "왜 뇌과학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근데 첫 번째 점령지에서 쌓인 후기와 언론 보도가 여기서도 쓰인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분할 정복의 핵심은 순서다.

가장 전환 효율이 높은 세그먼트를 먼저 먹는다. 거기서 후기, 사례, 콘텐츠, 노하우가 쌓인다. 그 자산을 들고 다음 세그먼트로 간다. 다음 세그먼트에서 또 자산이 쌓인다. 그걸 들고 그다음으로 간다. 눈덩이처럼 굴린다.

반대로 하면 망한다. 112개 세그먼트에 동시에 광고를 뿌린다. 자원이 분산된다. 어느 세그먼트에서도 1순위가 못 된다. 후기가 안 쌓인다. 입소문이 안 돈다. 가격 저항이 안 줄어든다. 광고비만 태운다.

대부분의 회사가 이렇게 한다. "20~40대 직장인 남녀" 타겟팅. 모두한테 말하려고 한다. 아무한테도 안 먹힌다. 어느 세그먼트에서도 1등이 못 된다. 영원히 "마케팅이 안 돼요"를 반복한다.


세그먼트를 좁히면 시장이 작아지는 거 아닌가?

아니다. 첫 번째 점령지가 작은 거지, 최종 시장이 작은 게 아니다.

페이스북을 보자. 처음엔 하버드 학생만 받았다. 그다음 아이비리그로 넓혔다. 그다음 미국 대학 전체. 그다음 고등학생. 그다음 전 세계 모든 사람. 처음부터 "전 세계 모든 사람"을 타겟으로 잡았으면 망했을 거다. 하버드 학생이라는 좁은 세그먼트를 완전히 먹고, 거기서 얻은 자산(입소문, 사회적 증거, 제품 개선)을 들고 넓혀나갔다.

바벨칩도 마찬가지다. "경쟁사 실망자 + 긴급 동기"라는 좁은 세그먼트를 먼저 먹는다. 거기서 후기가 쌓이고, "바벨칩은 진짜 된다"는 평판이 생기면, 그다음 세그먼트로 넓힐 때 훨씬 쉬워진다. 첫 번째 점령지는 작아도 된다. 완전히 먹기만 하면 된다.


세그먼트 해상도가 높아지면 콘텐츠 작업의 반이 끝난다.

"경쟁사 실망자 + 긴급 동기 + 고관여"라는 정의가 있으면, 이 사람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30대 중반 직장인. 대기업 또는 중견기업. 영어 인강 끊어봤다. 3일 듣고 관뒀다. 전화영어 6개월 했다. 매일 10분씩 하다가 흐지부지됐다. 학원 등록했다. 야근 터지면서 빠지기 시작했다. 환급 못 받고 끝났다. 영어앱 3개 깔았다. 다 1주일 만에 삭제했다. "나는 영어 체질이 아닌가 봐"라고 체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3개월 뒤에 미국 지사 파견이 확정됐다. 영어 안 되면 가서 개망신이다. 밤에 잠이 안 온다. 유튜브에 "3개월 영어 완성"을 검색한다.

이 사람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답이 나온다.

"인강 끊어봤죠. 전화영어도 해봤죠. 학원도 다녀봤죠. 안 됐죠. 왜 안 됐는지 아세요? 전부 의지력이 필요하니까요. 퇴근하고 피곤한데 영어 공부하려면 의지력이 필요합니다. 의지력은 소모품이에요. 매일 쓰면 바닥납니다. 바벨칩은 다릅니다. 자면 됩니다. 의지력 필요 없습니다."

이 메시지는 세그먼트에서 나왔다. 세그먼트를 모르면 이 메시지가 안 나온다. "바벨칩은 혁신적인 뇌과학 기술로 영어 학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이런 빈껍데기 카피가 나온다. 아무한테도 안 먹히는 말.


112개 조합을 만든 이유가 여기 있다.

전부 공략하려는 게 아니다. 전부 나열해놓고, 탈락시키고, 순위를 매겨서, 진짜 노려야 할 3~5개를 뽑아내려는 거다. 그 3~5개의 점령 순서를 정하려는 거다. 그리고 첫 번째 점령지에 바이팅, 마크, 오퍼를 완전히 최적화하려는 거다.

풀스택 고객 여정 지도는 "누구를 먼저 먹을 것인가"를 정하는 도구다. 먼저 먹을 세그먼트가 정해지면, 뭐라고 말할지는 반쯤 정해진 거다. 그 세그먼트를 완전히 먹으면, 다음 세그먼트로 가는 길이 열린다.

시장은 한 번에 먹는 게 아니다. 쪼개서, 하나씩, 완전히 먹는다. 분할 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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