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스택 고객 여정 지도 6편: 대부분의 회사가 이걸 안 하는 이유

여기까지 읽은 사람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이거 당연한 얘기 아닌가?" 맞다. 당연한 얘기다. 고객을 세그먼트로 나누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거기에 맞는 메시지를 만들고, 하나씩 점령해나간다. 마케팅 교과서 1장에 나올 법한 얘기다.

그런데 대부분의 회사가 이걸 안 한다.


안 하는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귀찮아서다.

112개 조합을 만들고, 탈락시키고, 순위를 매기는 건 시간이 걸린다. 세그먼트별로 바이팅을 다르게 만들고, 마크를 다르게 잡고, 오퍼를 다르게 설계하는 건 더 시간이 걸린다. 그냥 "20~40대 직장인 남녀"로 퉁치고 광고 하나 만드는 게 훨씬 빠르다.

당장 급하니까 빠른 쪽을 선택한다. 이번 달 매출 목표가 있다. 다음 주에 광고 시작해야 한다. 세그먼트 분석할 시간이 없다. 일단 돌리고 보자. 그래서 "영어, 이제 쉽게 배우세요" 같은 광고가 나간다. 아무한테도 안 먹힌다. 전환율이 낮다. "마케팅이 안 되네요. 예산을 늘려야 할까요?" 예산을 늘린다. 여전히 안 된다.

두 번째는 무서워서다.

세그먼트를 좁히면 나머지를 버리는 것 같다. "경쟁사 실망자 + 긴급 동기"만 노리면 다른 사람들은요? 그 사람들도 잠재 고객 아닌가요? 버리기 아깝다. 그래서 타겟을 넓게 잡는다. 모두를 잡으려다 아무도 못 잡는다.

좁히는 게 버리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른다. 순서의 문제라는 걸 모른다. 첫 번째 점령지가 좁은 거지, 최종 시장이 좁은 게 아니다. 근데 당장 좁아 보이는 게 무섭다. 그래서 넓게 간다. 어디서도 1등을 못 한다.

세 번째는 모르기 때문이다.

세그먼트를 나눈다는 개념은 안다. 근데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모른다. "인구통계적으로 나눠볼까요? 20대, 30대, 40대?" 그건 세그먼트가 아니다. 나이가 같다고 같은 사람이 아니다. "지역으로 나눠볼까요? 서울, 경기, 지방?" 그것도 세그먼트가 아니다. 서울 산다고 같은 고객이 아니다.

진짜 세그먼트는 행동과 맥락으로 나눈다. 이전에 뭘 경험했는지. 지금 얼마나 급한지. 이 구매가 얼마나 큰 결정인지. 이 세 축으로 나누면 같은 30대 서울 남성이라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분류된다. 근데 이런 축으로 나눌 생각을 못 한다. 그래서 인구통계로 나누거나, 아예 안 나눈다.


네 번째 이유가 가장 크다. 측정을 안 해서다.

세그먼트별로 전환율을 보려면 세그먼트별로 추적해야 한다. 광고 그룹을 나누고, UTM을 다르게 걸고, CRM에서 태깅하고. 번거롭다. 대부분의 회사는 전체 ROAS만 본다. "이번 달 광고 ROAS 2.3이에요." 어떤 세그먼트에서 2.3이 나온 건지 모른다.

전체로만 보면 평균의 함정에 빠진다. 경쟁사 실망자 + 긴급 동기 세그먼트에서 ROAS 8이 나오고, 카테고리 회의론자 세그먼트에서 ROAS 0.3이 나오면, 합쳐서 ROAS 2.3이 된다. "2.3이면 나쁘지 않네요. 예산 유지합시다." 근데 실제로는 8 나오는 데 돈을 더 쓰고 0.3 나오는 데 돈을 끊어야 한다. 쪼개서 안 보니까 모른다.

측정을 안 하면 학습이 안 된다. 어떤 세그먼트가 되고 어떤 세그먼트가 안 되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음에도 똑같이 한다. 전체 타겟, 전체 메시지, 전체 ROAS. 영원히 2.3 근처를 맴돈다.


다섯 번째는 조직 구조 문제다.

마케팅팀이 광고를 만든다. 제품팀이 제품을 만든다. 세일즈팀이 판다. 각자 KPI가 다르다. 마케팅팀은 클릭률을 본다. 세일즈팀은 계약 건수를 본다. 제품팀은 기능 출시를 본다.

세그먼트 중심으로 움직이려면 팀이 같이 움직여야 한다. 마케팅이 "경쟁사 실망자 + 긴급 동기"를 타겟으로 잡으면, 제품도 그 세그먼트에 맞게 온보딩을 설계해야 하고, 세일즈도 그 세그먼트에 맞는 스크립트를 써야 한다. 근데 팀이 분리돼 있으면 이게 안 된다. 마케팅은 마케팅대로, 제품은 제품대로, 세일즈는 세일즈대로 간다.

바벨칩 마케팅팀이 "경쟁사 실망자 + 긴급 동기" 세그먼트에 최적화된 광고를 만들었다고 치자. 클릭률이 좋다. 근데 랜딩페이지는 제품팀이 만들었는데 모든 세그먼트를 다 설명하려고 한다. 상담 스크립트는 세일즈팀이 만들었는데 "영어가 왜 중요한지"부터 설명한다. 긴급 동기 고객한테는 쓸데없는 말이다. 퍼널 중간에서 샌다. 누구 책임인지 모른다. 전체 전환율만 보니까 어디서 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부분의 회사 마케팅은 이렇게 된다.

타겟: 20~40대 직장인 남녀

메시지: "영어, 이제 쉽게 배우세요"

채널: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다 조금씩

측정: 전체 ROAS

결과: 2점대 맴돔

회의: "뭐가 문제일까요?"

결론: "소재를 바꿔봅시다" 또는 "예산을 늘려봅시다"

소재를 바꾼다. 여전히 2점대다. 예산을 늘린다. 절대 숫자는 커지는데 ROAS는 그대로거나 오히려 떨어진다. "경쟁이 심해져서 그래요." "시장이 포화됐나 봐요." 핑계가 쌓인다. 근데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세그먼트를 안 쪼개서다.


반대로 하면 어떻게 될까.

바벨칩 마케팅팀이 112개 조합을 그렸다. 탈락시키고 남은 게 16개. 그중에 "경쟁사 실망자 + 긴급 동기 + 고관여"를 1순위로 잡았다. 거기에 바이팅, 마크, 오퍼를 최적화했다.

광고 소재: "인강 끊어봤죠. 전화영어도 해봤죠. 학원도 다녀봤죠. 안 됐죠."

마크: "의지력 필요 없음. 자면서 됨."

오퍼: "효과 없으면 100% 환불"

타겟팅: "영어회화", "해외 취업", "외국계 이직" 관심사 + "3개월 영어 완성" 검색 키워드

이 조합으로 광고를 돌린다. ROAS가 8이 나온다. 이 세그먼트에서 후기가 쌓인다. "인강 다 실패했는데 바벨칩은 됐다"는 후기. 이 후기를 광고 소재로 쓴다. ROAS가 10이 된다. 입소문이 돈다. 광고비 대비 매출이 올라간다.

첫 번째 점령지가 안정되면 두 번째로 넓힌다. "경쟁사 실망자 + 활성 동기". 여기선 바이팅은 비슷하게 가고, 오퍼를 조금 바꾼다. 가격 정당화를 더 넣는다. 첫 번째 점령지에서 쌓인 후기와 사례를 재활용한다. ROAS 5가 나온다. 8보다 낮지만 모수가 크니까 절대 매출은 커진다.

이게 분할 정복이다. 하나씩 먹으면서 자산을 쌓고, 그 자산을 들고 다음으로 간다.


이걸 안 하는 회사와 하는 회사의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진다.

안 하는 회사는 광고비를 쓰면서 자산이 안 쌓인다. 매번 새로 시작한다. "이번엔 이 소재로 해볼까요?" "이번엔 저 채널 해볼까요?" 실험은 하는데 학습이 안 된다. 뭐가 되고 뭐가 안 되는지 모르니까. 전체 ROAS만 보니까. 3년이 지나도 2점대를 맴돈다.

하는 회사는 광고비를 쓰면서 자산이 쌓인다. 이 세그먼트에서 되는 바이팅, 되는 마크, 되는 오퍼가 축적된다. 후기가 쌓인다. 사례가 쌓인다. 노하우가 쌓인다. 3년이 지나면 그 세그먼트에서는 경쟁자가 넘볼 수 없는 위치가 된다. 그리고 다음 세그먼트로 간다.

복리의 차이다. 같은 돈을 써도 한쪽은 매번 0에서 시작하고, 한쪽은 어제 쌓은 것 위에서 시작한다.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벌어진다.


"그거 대기업이나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다. 오히려 작은 회사가 더 해야 한다. 자원이 적으니까. 분산하면 어디서도 못 이긴다. 집중해야 한다.

대기업은 분산해도 버틴다. 돈이 많으니까. 모든 세그먼트에 광고를 뿌려도 어디선가 걸린다. 비효율적이어도 규모로 커버한다. 작은 회사는 이게 안 된다. 비효율적으로 분산하면 망한다.

작은 회사의 무기는 집중이다. 대기업이 신경 안 쓰는 좁은 세그먼트를 찾아서, 거기에 올인해서, 완전히 먹는다. 그 세그먼트에서 1등이 된다. 대기업은 그 좁은 세그먼트를 따로 공략할 인센티브가 없다. 작아서. 작은 회사한테는 충분히 크다.

바벨칩이 영어 교육 시장 전체를 상대하면 진다. 스픽, 야나두, 민병철, 월스트리트잉글리시. 돈 많은 경쟁자가 널렸다. 근데 "경쟁사 실망자 + 긴급 동기"라는 세그먼트만 보면? 여기에 최적화된 경쟁자가 없다. 여기서 1등 할 수 있다. 여기서 1등 하면 다음으로 넓힐 수 있다.


풀스택 고객 여정 지도는 결국 "어디서 싸울 것인가"를 정하는 도구다.

112개 조합을 그리는 건 시장 전체를 보기 위해서다. 전체를 본 다음에 쪼갠다. 쪼갠 다음에 순서를 정한다. 순서를 정한 다음에 첫 번째 점령지에 올인한다. 올인해서 먹은 다음에 다음으로 간다.

당연한 얘기다. 근데 대부분 안 한다. 귀찮아서, 무서워서, 몰라서, 측정 안 해서, 조직이 안 맞아서. 이유는 많다. 결과는 하나다. "마케팅이 안 돼요"를 반복한다.

1편에서 말한 펩시와 달러 셰이브 클럽의 차이가 여기 있다. 펩시는 2억 명한테 말했다. 달러 셰이브 클럽은 "질레트에 질린 사람"한테만 말했다. 2억 × 0이 4500달러 × 0.1보다 작았다.

세그먼트를 모르면 퍼널에 0이 곱해진다. 노출을 아무리 늘려도 0이 곱해지면 0이다. 세그먼트를 알면 0을 피할 수 있다. 0이 아닌 곳에 자원을 집중할 수 있다. 거기서 자산을 쌓고 다음으로 갈 수 있다.

시장을 먹는 법은 하나다. 쪼개고, 집중하고, 먹고, 넓힌다. 분할 정복이다. 112개 조합은 그 첫 번째 단계다. 어디를 먼저 먹을지 정하는 것. 정하고 나면 반은 끝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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