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표와 기의, 상품형과 상품해

캐스크 스트렝스(Cask Strength) 위스키라는 게 있다. 일반 위스키와 뭐가 다르냐면, 물을 안 섞었다. 그게 전부다. 통에서 바로 꺼낸 거다.

그런데 위스키 덕후한테 캐스크 스트렝스가 뭐냐고 물어보면 "도수 높은 술"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블렌더가 되는 거지."

증류소는 보통 위스키에 물을 섞어서 40도로 맞춘다. 맛의 균형점을 증류소가 정한다. 캐스크 스트렝스는 이 결정을 유보한 위스키다. 58도, 62도 그대로 병에 담는다. 물을 얼마나 넣을지, 어떤 농도로 마실지를 소비자한테 넘긴다.

덕후들은 한 방울씩 물을 떨어뜨리며 풍미가 열리는 걸 지켜본다. 물이 들어가면 알코올과 물의 비율이 달라지면서 일부 향 성분이 표면으로 몰린다. 어떤 향은 더 선명해지고, 어떤 향은 가라앉는다. 희석된 일반 위스키에서는 증류소가 이미 결정해버린 것들이다.

캐스크 스트렝스는 대부분 냉각여과를 안 한다. 물이나 얼음을 넣어서 도수가 46% 아래로 떨어지면 뿌옇게 된다. 덕후들은 이 혼탁함을 사랑한다. 아무것도 빠지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그냥 센 술 찾는 사람한테 캐스크 스트렝스는 뭔가? 비싸고 독한 술이다. 목구멍 타는 거. 물리적으로는 같은 술이다. 근데 완전히 다른 물건을 산 거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상품은 안 바뀌었다. 병도 같고, 액체도 같고, 라벨도 같다. 바뀐 건 사는 사람이다. 근데 가치가 달라졌다. 한쪽에선 "마스터 블렌더 경험"을 샀고, 한쪽에선 "그냥 독한 술"을 샀다.

초보 마케터들은 이걸 이해 못 한다. 그들은 상품에 가치가 박혀 있다고 생각한다. 캐스크 스트렝스에는 "캐스크 스트렝스의 가치"가 있고, 그걸 잘 전달하면 된다고 믿는다. 틀렸다. 상품 안에는 가치가 없다. 스펙만 있다.

바이트마크에서는 이걸 상품형(商品形)과 상품해(商品解)로 구분한다. 상품형은 물리적 실체다. 물 안 섞은 고도수 위스키. 이건 고정이다. 바뀌지 않는다. 상품해는 그 상품이 특정 사람한테 갖는 의미다. 이건 고정이 아니다. 대상에 따라 미끄러진다.

언어학자들이 비슷한 걸 발견했다.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기표와 기의를 구분했다. "사과"라는 글자와, 그 글자가 가리키는 빨간 과일. 라캉(Jacques Lacan)은 여기서 더 나갔다. 기의는 기표 밑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했다. 같은 단어가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상품도 마찬가지다. 같은 상품형이 대상에 따라 다른 상품해를 갖는다.

캐스크 스트렝스의 상품형은 하나다. 상품해는 여러 개다. 덕후한테는 통제권이고, 순수주의자한테는 원본이고, 플렉스러한테는 비싼 술이다. 상품형은 중립이다. 상품해는 대상과 문제가 결정한다.


많은 마케터들이 범하는 실수가 여기 있다. 그들은 상품형을 나열한다. "물 안 섞었습니다, 도수 58도입니다, 숙성 12년입니다." 다 맞는 말이다. 근데 이건 택배 송장이지 마케팅이 아니다.

바이팅이 안 나오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이 상품의 바이팅을 뭘로 하지?"라고 묻는다. 질문이 틀렸다. 상품형만 놓고 상품해를 짜내려는 거다. 안 나온다. 상품해는 짜내는 게 아니라 연결하는 거다. 대상과 문제를 먼저 정해야 상품해가 생긴다. 상품해가 있어야 3초 안에 이빨이 박힌다.

마크도 마찬가지다. 마크는 특정 상황이 오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거다. 근데 상황이 뭔가? 대상의 문제다. 문제가 정의 안 됐는데 마크가 남을 리 없다. 뇌에 새길 주소가 없는 거다.

상품형을 바꾸지 않아도 상품해는 바뀐다. 대상을 바꾸면 된다. 문제를 바꾸면 된다. 똑같은 물건이 어떤 사람한테는 인생템이고, 어떤 사람한테는 있으나 마나다. 제품 탓이 아니다. 연결 탓이다.

마케팅은 상품형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상품형을 상품해에 연결하는 거다. 캐스크 스트렝스는 물을 안 섞은 위스키가 아니다. 누구한테 파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물건이 된다. 상품형은 같다. 상품해만 미끄러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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