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격차라는 환상

열에 여덟은 "초격차"를 말한다. "저희는 기술로 초격차를 만들 겁니다." "이 시장에서 초격차 1위가 목표입니다." 초격차. 압도적 차이. 경쟁자가 넘볼 수 없는 격차. 멋진 말이다. 문제는 대부분이 이 말을 쓸 자격이 없다는 거다.


초격차라는 개념이 유행한 건 삼성 반도체 때문이다. 1990년대, 삼성은 D램 시장에서 일본을 추월했다. 그리고 한 번 앞서자 계속 앞섰다. 2위와의 격차가 줄어들 틈을 안 줬다. 경쟁자가 쫓아오면 더 빨리 달렸다. 이게 초격차다.

근데 삼성이 초격차를 만들 수 있었던 조건이 있다. 반도체는 자본 집약 산업이다. 공장 하나 짓는 데 수조 원이 든다. 한 번 앞서면 그 이익으로 다음 투자를 한다. 뒤처진 경쟁자는 투자할 돈이 없다. 앞선 자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구조다. 승자 독식이 가능한 시장이다.

여기에 삼성의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 오너의 결단. 반도체 적자가 수천억씩 나도 버틸 수 있는 그룹 체력. 평생고용 문화의 일본 기업이 따라올 수 없는 의사결정 속도. 이 조건들이 맞아떨어졌다.


문제는 이 단어가 아무 데나 쓰인다는 거다.

카페 창업하면서 "초격차 커피"를 말한다. 앱 하나 만들면서 "초격차 UX"를 말한다. 온라인 강의 팔면서 "초격차 커리큘럼"을 말한다. 초격차가 가능한 시장 구조인지, 우리가 그걸 만들 자원이 있는지, 아무도 안 따진다. 그냥 멋있으니까 쓴다.

초격차는 특정 조건에서만 작동한다. 그 조건을 보자.

첫째, 규모의 경제가 극단적으로 작동하는 시장. 반도체, 클라우드, 플랫폼. 크면 클수록 단위 비용이 떨어지고, 그 차이가 다시 성장 자원이 되는 구조. 카페는 이게 안 된다. 매장 100개 해도 원두 원가가 극적으로 안 떨어진다.

둘째, 네트워크 효과가 있는 시장. 사용자가 많을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구조. 페이스북, 카카오톡, 에어비앤비. 한 번 앞서면 사용자가 사용자를 부른다. 뒤처진 경쟁자는 쫓아갈 수가 없다. 반면 온라인 강의는 네트워크 효과가 약하다. 내가 이 강의 듣는다고 다른 사람한테 가치가 생기지 않는다.

셋째, 초기 투자 후 한계비용이 0에 가까운 시장. 소프트웨어가 대표적이다. 한 번 만들면 복제 비용이 거의 없다. 앞선 자가 이익을 다 가져간다. 반면 서비스업은 사람이 들어간다. 고객이 늘면 인력도 늘어야 한다. 한계비용이 줄지 않는다.

이 조건들이 없는 시장에서 "초격차"를 외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아무 일도 안 벌어진다. 열심히 달려도 경쟁자가 쫓아온다. 격차가 안 벌어진다. "왜 안 되지?" 시장 구조를 안 봤기 때문이다.


경쟁 상태도 봐야 한다.

시장에는 단계가 있다. 새로 생긴 시장, 성장하는 시장, 성숙한 시장, 쇠퇴하는 시장. 각 단계에서 경쟁의 규칙이 다르다.

새로 생긴 시장. 경쟁자가 없거나 적다. 여기선 초격차가 아니라 "먼저 차지하기"가 중요하다. 땅따먹기다. 빈 땅이 널렸는데 초격차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빨리 가서 꽂으면 된다. 이 단계에서 "초격차 기술"을 연마하겠다고 R&D에 3년 투자하면 바보다. 그 사이에 경쟁자가 시장을 다 먹는다.

성장하는 시장. 경쟁자가 생긴다. 근데 파이가 커지니까 다 같이 큰다. 여기선 경쟁보다 성장이 중요하다. 경쟁자 신경 쓰느라 성장을 놓치면 안 된다. 초격차를 만들겠다고 경쟁자 죽이기에 자원을 쓰면, 정작 시장 성장을 못 따라간다. 그 자원을 성장에 써야 한다.

성숙한 시장. 파이가 안 커진다. 경쟁자가 많다. 여기서 초격차를 만들 수 있을까? 어렵다. 이미 비슷비슷한 플레이어들이 자리 잡았다. 삼성이 반도체에서 초격차를 만든 건 시장이 성장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숙한 시장에서는 "차별화"가 더 현실적이다. 다르게 가는 거다. 정면 승부로 압도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세그먼트를 찾는 거다.

쇠퇴하는 시장. 여기서 초격차를 말하면 미친 거다. 배에서 물 퍼내면서 "초격차로 물을 퍼내겠습니다"라고 하는 꼴이다. 탈출이 답이다.


경쟁자의 상태도 봐야 한다.

경쟁자가 약하면 초격차가 필요 없다. 그냥 이긴다. 굳이 압도적 격차를 만들 필요 없이 조금만 나아도 된다. 자원을 아껴서 다른 데 쓰는 게 낫다.

경쟁자가 나와 비슷하면 초격차를 노릴 수 있다. 근데 비용이 많이 든다. 둘 다 비슷한 자원을 갖고 있으니까 압도하려면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다. 그 투자 대비 효과가 있는지 따져야 한다. 차라리 다른 세그먼트로 가는 게 나을 수 있다.

경쟁자가 나보다 훨씬 강하면 초격차는 망상이다. 삼성이 반도체에서 초격차를 만들 때, 삼성보다 작은 회사들은 뭘 했을까. 초격차를 따라가려다 죽었다. 살아남은 회사들은 틈새를 찾았다. 삼성이 신경 안 쓰는 특수 목적 반도체, 아날로그 반도체 같은 곳으로 갔다. 강한 경쟁자가 있으면 정면 승부가 아니라 우회가 답이다.


"그래도 우리는 기술로 초격차를 만들 수 있어요."

기술로 초격차를 만들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기술은 생각보다 빨리 따라잡힌다. 특허가 있어도 우회 기술이 나온다. 핵심 인력을 빼가면 기술이 유출된다. 기술 자체로 지속적인 격차를 유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초격차가 유지되는 건 기술 때문이 아니다. 시스템 때문이다. 삼성 반도체의 초격차는 기술만이 아니었다. 수율 관리 시스템, 의사결정 속도, 투자 결단력, 공급망 관리. 이 모든 게 맞물려서 돌아갔다. 기술 하나 따라잡는다고 삼성을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다.

스타트업이 "기술 초격차"를 말할 때, 대부분 기술 하나를 말한다. 알고리즘이 좋다, 특허가 있다, 핵심 인력이 있다. 이건 초격차가 아니다. 진입 장벽(Barrier)일 수는 있다. 근데 진입 장벽은 시간을 벌어줄 뿐이다. 그 시간 안에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시스템 없이 기술 하나로 버티겠다는 건 착각이다.


그러면 언제 초격차를 노려야 하나.

조건이 맞을 때. 규모의 경제가 극단적으로 작동하거나, 네트워크 효과가 있거나, 한계비용이 0에 가까운 시장. 그리고 경쟁자보다 자원이 충분할 때. 시장이 성장 단계에 있을 때.

이 조건이 다 맞아야 한다. 하나라도 안 맞으면 초격차 전략은 자원 낭비다. 차라리 다른 전략을 써야 한다.

다른 전략이 뭐가 있나.

차별화. 경쟁자와 다른 가치를 제공한다. 같은 시장에서 정면 승부하지 않고, 다른 축으로 경쟁한다. 바벨칩이 "영어 교육 시장 초격차 1위"를 노리는 건 망상이다. 스픽, 야나두, 월스트리트잉글리시와 정면 승부해서 이길 자원이 없다. 대신 "수면 중 학습"이라는 다른 축으로 차별화할 수 있다. 이건 초격차가 아니라 차별화다.

니치 집중. 큰 시장을 버리고 작은 세그먼트에 집중한다. 거기서 1등을 한다. 5편에서 말한 분할 정복이다. 전체 시장 초격차가 아니라 좁은 세그먼트 장악. 이게 더 현실적이다.

빠른 실행. 경쟁자보다 빨리 움직인다. 기술 격차가 아니라 속도 격차. 경쟁자가 6개월 걸릴 걸 3개월에 한다. 이건 유지 가능한 격차는 아니지만, 시장을 먼저 차지하는 데는 충분하다.


초격차를 남발하는 진짜 이유가 있다. 멋있어서다.

"차별화하겠습니다"보다 "초격차 만들겠습니다"가 더 세 보인다. 투자자 앞에서도 그렇고, 팀한테도 그렇다. 비전이 커 보인다. 야망이 있어 보인다.

근데 말이 전략을 대체할 수는 없다. 초격차라고 백 번 말해도 조건이 안 맞으면 초격차는 안 생긴다. 오히려 조건에 안 맞는 전략을 고집하다가 자원만 태운다.

경쟁 전략의 첫 번째 원칙은 현실을 보는 거다. 우리 시장은 어떤 구조인가. 경쟁자는 어떤 상태인가. 우리 자원은 얼마나 있는가. 이걸 보고 나서 전략을 정해야 한다. 초격차가 가능하면 초격차를 한다. 아니면 다른 걸 한다.

삼성도 모든 사업에서 초격차를 만든 게 아니다. 반도체에서는 초격차를 만들었지만, 다른 사업에서는 다른 전략을 썼다. 사업마다 조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삼성은 초격차 기업"이라고 단순화하면 잘못 배운다. 삼성은 조건에 맞는 전략을 쓴 기업이다. 반도체에서 그 조건이 초격차였을 뿐이다.


피칭에서 초격차를 빼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저희는 이 세그먼트에서 1등 하겠습니다." 이게 더 정직하다. 어떤 세그먼트인지, 왜 거기서 이길 수 있는지, 거기서 이긴 다음에 어떻게 확장할 건지. 이게 진짜 전략이다.

"저희는 이렇게 차별화됩니다." 이것도 좋다. 경쟁자와 뭐가 다른지, 그 다름이 왜 고객한테 가치가 있는지, 그 차별화를 어떻게 유지할 건지.

"저희는 빠릅니다." 이것도 전략이다. 경쟁자보다 빠르게 실행해서 시장을 먼저 먹겠다. 초격차만큼 섹시하진 않지만 현실적이다.

초격차는 멋진 말이다. 근데 멋진 말이 멋진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조건을 보고, 상태를 보고, 자원을 보고, 거기에 맞는 전략을 써야 한다. 초격차가 맞으면 초격차를 한다. 아니면 다른 걸 한다. 전략은 현실에서 나온다. 슬라이드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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