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눈으로 보는가
몰스킨 노트 하나가 있다. 검은 표지, 고무밴드, 180페이지. 물리적으로 동일하다.
작가 지망생한테 이게 뭔가? "헤밍웨이가 쓰던 그 노트." 빈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그는 작가 계보에 자기 이름을 올린다. 20,000원이 아니라 정체성을 산 거다.
그냥 메모 필요한 직장인한테는? "다이소 노트보다 열 배 비싼 거." 기능은 똑같은데 왜 이렇게 비싸냐는 불평. 호갱의 증거.
노트는 그대로다. 바뀐 건 보는 사람의 눈이다.
이게 전부다. 상품은 중립이다. 가치는 대상이 부여한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1916년에 기표와 기의를 구분했다. 기표는 물리적 형태다. 소리, 글자, 이미지. 기의는 그게 가리키는 개념이다. "사과"라는 글자가 기표면, 빨갛고 둥글고 먹을 수 있는 그 과일 이미지가 기의다.
소쉬르는 둘 사이가 자의적이라고 했다. 자연법칙 같은 건 없다.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로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기표와 기의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자크 라캉은 동의하지 않았다. "기표 아래로 기의가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계속 흘러다닌다. 라캉은 이 미끄러짐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는 정박점이 있다고 했다. 누빔점. 이게 충분히 있어야 정상이고, 없으면 정신병이라고.
자크 데리다는 더 나갔다. 차연이라는 개념. 의미는 항상 다른 기호와의 차이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지연된다. "정의"를 정의하려면 "공정함"이 필요하고, "공정함"을 정의하려면 "평등"이 필요하고. 끝이 없다. 데리다는 "초월적 기의는 없다"고 했다. 최종적인 의미, 궁극의 도착점 같은 건 없다. 기표들의 끝없는 유희만 있을 뿐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걸 문화 비평에 적용했다. 신화라는 개념. 1차 기호체계에서 완성된 기호가 2차 체계에서는 그냥 기표가 된다. 거기에 새로운 기의가 붙는다. 그의 유명한 예시. 프랑스 잡지 표지의 흑인 병사가 프랑스 국기에 경례하는 사진. 1차 의미는 "병사가 국기에 경례한다"다. 2차 의미, 즉 신화는? "프랑스는 위대한 제국이고, 모든 식민지 청년들이 충성스럽다." 기표는 사진 한 장인데 기의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미끄러졌다.
상품이 딱 이거다. 상품은 기표다. 물리적 실체. 스펙. 성분. 이건 고정이다. 근데 가치는 기의다. 그리고 기의는 미끄러진다. 누가 보느냐에 따라, 어떤 맥락이냐에 따라, 어떤 문제를 들고 왔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캐스크 스트렝스 위스키를 보자. 물을 안 섞은 고도수 위스키. 이게 기표다. 위스키 덕후한테는 뭔가? "내가 블렌더가 된다"는 통제권이다.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며 풍미가 열리는 걸 지켜보는 권한. 그냥 독한 술 찾는 사람한테는? "센 거." 목 타는 거. 기표는 같다. 기의가 완전히 다르다.
테슬라 모델 3. 기표는 전기차다. 배터리, 모터, 바퀴. 환경주의자한테는? "지구를 덜 망치는 선택." 탄소발자국 줄이는 거. 죄책감 해소 수단. 테크 덕후한테는? "바퀴 달린 컴퓨터." OTA 업데이트, 오토파일럿, 0-100 가속 3.3초.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지배하는 새 패러다임. 플렉스하고 싶은 사람한테는? "전기차 타는 사람 = 앞서가는 사람"이라는 신호. 같은 모델 3인데 세 명이 산 건 다른 물건이다.
초보 마케터들은 여기서 헷갈린다. 상품에 가치가 박혀 있다고 생각한다. 기표 안에 기의가 내장되어 있다고 믿는다. "우리 제품은 이런 가치가 있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가치를 전달하려고 한다. 마치 택배 보내듯이. 보내면 도착할 거라고 생각한다.
틀렸다. 상품은 중립이다. 기표는 비어 있다. 가치는 상품 안에 없다. 가치는 대상과 문제 사이에서 생긴다. 기의는 받는 사람 머릿속에서 만들어진다.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커피 맛 따지는 사람한테는 "그냥저냥 마시는 커피." 로스팅 과하고 원두 다양성 없고. 기능적 음료다. 프리랜서한테는? "4천 원짜리 사무실." 콘센트, 와이파이, 에어컨, 화장실. 카페 값이 아니라 임대료다. 인스타 감성 찾는 사람한테는? "스벅 가는 나"라는 셀프 이미지. 사이렌 로고가 찍힌 컵을 들고 있는 자기 자신. 기표는 커피 한 잔. 기의는 세 개다.
바이팅이 안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상품을 고정값으로 놓고 시작하니까. "이 상품의 바이팅을 뭘로 하지?"라고 묻는다. 질문이 틀렸다. 기표만 놓고 기의를 짜내려는 거다. 안 나온다. 기의는 짜내는 게 아니라 연결하는 거다.
데리다 말대로 기의는 항상 연기된다. 당신이 대상과 문제를 정해야 기의가 도착한다. "누구의 어떤 문제에 이 상품을 연결하지?"가 먼저다. 대상과 문제가 정해지면 기의가 생긴다. 가치가 생긴다. 그러면 바이팅은 저절로 나온다.
3초 안에 이빨이 박히려면 기의가 있어야 한다. 기표만 보여주면 스펙 나열이다. 스펙 나열은 이빨이 안 박힌다. 마크도 마찬가지다. 마크는 "이 상황이 오면 자동으로 이 브랜드가 떠오른다"는 거다. 근데 상황이 뭔가? 대상의 문제다. 라캉의 정박점과 같다. 기표와 기의가 일시적으로 고정되는 지점. 문제가 정의 안 됐는데 정박점이 생길 리 없다. 마크가 남을 리 없다.
상품을 바꾸지 않아도 가치는 바뀐다. 기표를 건드릴 필요 없다. 대상을 바꾸면 된다. 문제를 바꾸면 된다. 기의가 미끄러질 방향을 정하면 된다. 바르트가 말한 2차 기호체계를 설계하는 거다. 똑같은 물건이 어떤 사람한테는 인생템이고, 어떤 사람한테는 있으나 마나다. 제품 탓이 아니다. 연결 탓이다.
마케팅은 상품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기표를 기의에 연결하는 거다. 상품과 사람 사이에 의미를 만들어내는 거다. 신화를 쓰는 거다. 상품이라는 기표에 어떤 기의를 붙일지, 어떻게 자연스럽게 보이게 할지를 설계한다.
캐스크 스트렝스는 물을 안 섞은 위스키가 아니다. 누구한테 파느냐에 따라 "마스터 블렌더의 권한"이 되기도 하고, "그냥 독한 술"이 되기도 한다. 몰스킨은 노트가 아니다. "작가의 계보"가 되기도 하고, "호갱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기표는 같다. 기의만 미끄러졌을 뿐이다. 상품은 중립이다. 가치를 결정하는 건 당신이 고른 대상과, 그 대상이 가진 문제다. 초월적 기의는 없다. 절대적 가치도 없다. 미끄러질 방향을 정하는 건 마케터의 몫이다.